파사르가다에(Pasargadae)는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제국의 창시자인 키루스 대왕에 의해 세워진 고대 도시로, 오늘날 이란의 파르스 지방에 위치한다. 한때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고대 세계의 중요한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였으며, 특히 아케메네스 왕조의 건국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파사르가다에는 점차 잊혀 갔고, 오늘날까지도 도시의 기원, 기능, 그리고 그 몰락의 원인에 대해 많은 수수께끼가 남아 있다. 이 글에서는 파사르가다에의 역사적 배경, 도시의 구조와 건축적 특징, 그리고 여전히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들을 심층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파사르가다에의 발견
파사르가다에는 키루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메디아 왕국을 정복한 직후 수도로 지정되었다. 이 도시는 기원전 546년경에 세워졌으며, 페르시아 제국의 첫 번째 수도로서 정치적, 군사적 중심지의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기원전 330년경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후로 파사르가다에는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페르세폴리스가 새로운 정치적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도시의 역할은 점점 축소되었다.
파사르가다에가 유럽 학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이었다. 프랑스 고고학자 앙드레 고다르가 이 도시의 유적을 조사하고 발굴하면서, 파사르가다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의 연구는 이후 여러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이 파사르가다에의 잔해들을 복원하고 분석하는 데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파사르가다에의 유적은 지속적인 발굴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고대 페르시아의 문명과 건축 양식, 그리고 그들의 통치 구조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역사와 건축의 특징
파사르가다에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 중 하나는 키루스 대왕의 영묘이다. 이 영묘는 파르스 지방의 넓은 평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기원전 530년경 키루스 대왕의 사후에 세워졌다. 영묘는 단순하면서도 웅장한 구조로, 육면체 모양의 기단 위에 작은 방 형태의 구조물이 위치한 형태를 띤다. 이러한 구조는 당시 다른 고대 왕국들의 화려한 묘비 양식과는 달리, 절제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페르시아 건축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영묘의 디자인은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의 건축 양식이 혼합된 형태로, 특히 그리스의 신전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키루스 영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 단순함과 소박함으로, 이는 당시 페르시아 통치자들의 겸손한 성향과 실용성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 영묘의 단순함이 오히려 키루스 대왕의 강력한 정치적, 종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파사르가다에의 중심에 위치한 영묘는 그 자체로도 아케메네스 왕조의 창립자로서 키루스의 위상을 나타내며, 그의 통치 철학을 상징하는 중요한 기념물로 간주된다.
파사르가다에의 정원은 단순히 미적 요소를 넘어, 고대 페르시아 문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공간이었다. 이 정원은 '파르다이스(Paradise)'라는 용어의 기원을 제공하는데, 고대 페르시아어에서 '파르다이스'는 왕의 정원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파사르가다에 정원은 당시 정원 설계의 정수를 보여주며, 인공적으로 조성된 수로와 정교하게 배치된 식물들로 구성되었다.
파사르가다에 정원은 단순한 장식적 기능을 넘어 정치적, 종교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 정원은 왕의 통치권을 상징하며, 통치자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설계되었다. 또한, 정원의 설계와 구성은 훗날 이슬람 세계의 정원 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파사르가다에의 정원 개념은 현대까지도 정원 건축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파사르가다에의 주요 건축물 중 하나인 아파다나 궁전은 공공행사와 공식 의식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이 궁전은 대리석으로 지어졌으며, 그 벽면에는 페르시아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묘사한 벽화와 조각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아파다나 궁전의 건축 양식은 페르세폴리스의 대규모 건축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건축적 특징들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권위와 예술적 성취를 잘 보여준다.
파사르가다에의 건축물들은 당대 페르시아 제국의 기술적, 예술적 발전을 반영하는 중요한 유산이다. 도시의 건축적 배치는 단순한 도시 설계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왕의 통치 철학, 종교적 신념, 그리고 문화적 성취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파사르가다에의 건축 양식은 이후 여러 세대의 페르시아 건축과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몰락 원인에 관한 미스터리
파사르가다에의 몰락과 잃어버린 역사는 아직도 많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다. 도시가 갑작스럽게 쇠퇴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며, 이에 대한 다양한 가설이 존재한다.
하나의 가설은 자연재해의 가능성이다. 고고학적 발굴 과정에서 도시 근처의 지형과 지질학적 특성을 분석한 결과, 대규모 지진이나 가뭄 같은 자연재해가 도시의 쇠락을 촉발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자연재해가 도시의 경제적 활동과 농업에 큰 타격을 주었을 수 있으며, 이는 파사르가다에 주민들이 도시를 떠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또 다른 가설로는 정치적 변화가 꼽힌다. 페르시아 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의 침략 이후 빠르게 변화했으며, 아케메네스 왕조의 중심지가 파사르가다에에서 페르세폴리스로 이동하면서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로서의 기능이 상실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정치적 변화는 도시의 경제적 활동을 약화시켰고, 결과적으로 파사르가다에는 버려지게 되었다.
파사르가다에의 유적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물들은 고대 페르시아의 사회, 종교, 정치 구조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파사르가다에의 고대 조각과 벽화는 당시의 종교적 의식과 의례, 신화적 상징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당시 페르시아인들의 종교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도시의 잔해 속에서 발견된 금속 공예품과 세밀한 조각들은 고대 페르시아의 뛰어난 공예 기술을 보여주며, 아케메네스 시대의 경제적 번영을 증명하는 자료로 평가된다. 이러한 유물들은 고대 페르시아의 무역 네트워크와 예술적 교류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며, 이 지역이 단순한 정치적 중심지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가 융합된 교차로였음을 시사한다.
키루스 대왕의 영묘는 단순히 무덤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영묘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창립자이자 제국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키루스의 업적을 기리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 단순한 구조는 과연 키루스 본인의 의지였는지, 혹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결정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키루스가 생전에 제국을 다스리며 겸손과 실용성을 중시했기 때문에, 그의 무덤 역시 그러한 철학을 반영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또 다른 견해는 키루스의 무덤이 고대 이란의 전통적인 장례 문화와 신앙 체계에 따라 설계되었으며, 페르시아 제국의 왕권과 그 신성성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로 세워졌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결론
파사르가다에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적, 문화적 유산을 간직한 도시로, 그 미스터리한 과거와 건축적 유산은 오늘날에도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도시의 유적을 통해 우리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를 이해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문화적 성취를 재조명할 수 있다. 특히, 키루스 대왕의 영묘와 파사르가다에의 정원은 단순한 유적을 넘어, 고대 세계의 통치 철학과 종교적 상징성을 담고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는다.
파사르가다에의 수수께끼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풀리지 않았지만, 계속되는 발굴과 연구를 통해 이 도시는 점차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파사르가다에에 대한 연구는 단순히 과거를 밝혀내는 작업을 넘어, 인류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고대 페르시아가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을 재평가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다.